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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감정의 적은 감정이다 감정이 감정을 밟고 감정이 감정을 쓰러뜨린다 퉁퉁 부은 얼굴로 눈 코 입이 뭉그러질 때까지 다시 눈 코 입을 그려 넣을 때까지 얼마나 감정적이면 감정이 감정을 만나 다시 감정의 적이 될까 사람은 사람을 낳고 감정은 감정을 낳는데 사람은 사람을 낳고 왜 감정이 되는가 감정을 낳고도 감정적이 되지 않는다면 감정적인 감정들과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데 그런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감정을 먹고 감정을 배설하는 감정의 동물 감정의 악순환 감정의 폭식, 폭식은 요요를 무르고 요요라고 하면 언제든 쪼르르 감정이 달려나올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감정만이 계속 감정에게 꼬리를 쳐왔을 뿐 감정의 꼬리는 길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런 감정들은 싹둑, 그래도 감정적이 되지 않는다면 완전 ..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사냐고 누군가는 타이르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면 내가 지금 애써 버텨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책임감과 죄책감, 그것들로 얼룩져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비참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현생을 희생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비교해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 현생의 불행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지 좋아하는 일이 영원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로 인해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행복 이외에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

선택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는지 죽음이라는 선택지의 존재를 모르는 것 뿐일까 혹은 죽음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 수긍하고 타협해 가는 사람들을 보면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말도 안되는 세상이 당연하다는 것을, 혹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것이니까 말이다.

짊어진 것

끊임없는 죄책감에 속이 뒤틀린다 감당할 수 없어 끝내 마무리지지 못하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책임감 어깨에 맨 것도 없는데 나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땅이 꺼지도록 밑으로 파묻힌다 감당하지 못한 책임감과 나로 인해 일어난 일들에 대한 죄책감이 뒤엉켜 나를 옭아매고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다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음 조차 장담할 수 없는 세상에서 더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며 살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이 고통을 버텨낼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이유

누가 이리 난장판을 만들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정돈되어 있는 것 하나없다 누가 그러더라 세상에서 더 많은 슬픔을 느끼도록 태어난 사람들은 결국 글을 쓰게 된다고 그 사람들은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픔을 달고 태어난다고 잘 쓰던 못 쓰던 수요 없는 공급이 되어도 태어날 때부터 글을 쓰게끔 태어난다고 나는 슬플 때 글을 쓴다 감정이 요동칠 때 글을 쓴다 나를 표현하려고 나를 드러내려고 나를 알리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글을 쓴다

착불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권대웅,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中